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容闳(롱홍)은 중국 근대 초기 사회 개혁주의자이자 중국 유학생 사업의 선구자이다. 자는 达萌, 호는 纯甫로, 1828년 11월 17일 광동 향산현 난병촌(현 주해 시 난병진)에서 태어났다. 1847년 도광 27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예일대학교에 입학, 1854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미국 대학을 졸업한 첫 번째 중국 유학생이 되었다. 이후 미국 국적을 취득한 뒤 1855년 모국으로 돌아와 중국 광주의 미국 영사관, 홍콩의 고등 기관, 상해 해관소 등에서 일하며 차 사업을 시작했다.

1860년 태평천국 운동이 일어날 때 태평천국의 수도 천경에서 洪仁玕에게 우수한 군대 조직을 제의하며 군사학교와 해군학교 설립, 효율적인 정부 건립, 교육 제도 등 7개 항목을 건의했다. 1868년 청 정부에 아동과 청소년 조기 선발 유학에 관한 4개 항목의 진술서를 제출하고, 1870년 어린이들의 조기 유학 과정 이수 기관의 부의원 및 유학사무 부감독원으로 임명되었다.

1872년 상부 기관의 명령에 따라 30명의 학생이 미국으로 출국하였고, 容闳은 학생들을 관리하며 미국 주재 부사관으로 겸임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은 "중국 조기 미국 유학 운동"(1872~1881)으로 불린다. 1875년 미국, 스페인, 페루 세 나라의 부대신으로 임명되었으나, 1881년 청 정부는 유학생들을 철수시켰다. 그는 양무파에 대한 실망으로 1882~1894년 동안 미국에 거주하였다. 1894년 중일 갑오전쟁 시기에는 张之洞에게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군함을 마련할 자금을 조달할 것을 제안했다. 백일 개혁 시기에는 북경을 왕래하며 유신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개혁 실패 후 상해로 거처를 옮겨 변법유신 운동에 참가했다.

1900년 唐才常의 자립회가 "중국국회"로 개명되면서 容闳은 회장으로 임명되어 대외 활동 및 선언의 책임을 맡았다. 자립군 봉기가 진압되자 청 정부에 의해 지명수배되어 이곳저곳 떠돌다 결국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그는 중국 내 개혁파와 지속적으로 연락하며 점점 손문 선생의 개혁 활동을 지지하게 되었다.

1912년 1월 손문 선생이 중화민국 임시 총통으로 취임할 때 그는 축하 편지를 보냈다. 4월 12일 그는 미국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에서 사망하였다. 중국인들은 1847년 태평양을 건너 처음으로 미국에 간 그날을 기억해야 한다. 容闳의 회고록 《西学东渐记》(영문판 제목: My Life in China and America)는 1981년과 1985년에 호남 인민출판사 상무도서관에서 1915년 중역본으로 재판된 <세계로 향하는 총서>에 포함되었다.


 

내 멋대로 직역해서 오역이 많다.. 정말 파란만장한 인생인 듯..

자기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안타까운 인물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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