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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 원 세대, 20 대개 새끼론에 이어 이젠 3포 세대까지 나왔다. 연애, 결혼, 출산 세 가지를 모두 포기했다는 말이다. 이에 허덕이는 취업난까지 더하면 4포 5포 10포 세대까지 등장할 기세다. 젊은이들은 스스로 잉여라고 말한다. 상상하고 꿈꾸는 나의 꿈, 미래의 모습과 멋진 커리어를 생각하며 밤에 설레어 잠을 못 이뤄야 하는 청춘들은 도리어 고개를 떨구며 힐링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각종 유명 인사가 나와 포기하지 말라면 힐링 어린 경험담들을 이야기한다.

 

잉여사회의 저자는 우리 사회가 이토록 잉여스럽게 변한 이유를 그만의 관점으로 속 시원하게 풀어냈다. 가볍게 읽기 시작했지만 책을 덮는 순간까지 가벼울 수 없었던 그의 논리와 함께 잉여의 관점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해 준다.

 


이 시대의 기준으로는 밤새워 일하다가 나도 모르게 쏟는 코피는 괜찮지만,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다 흘리는 피는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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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 우리는 여전히 패배하는 중이다. 그러나 이들과 달라진 점이 있다. 오늘의 패배자들에게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예민한 감수성이 아니라, 일상적인 패배 속이서 무던해지고 무감각해진 감수성이 남아 있다. 어떻게든 먹여주고 살려주던 호황의 시대는 속절없이 끝났고, 루저들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여줄 사람들의 여유도 늘어가는 빚 속에서 사라졌다. 우리 시대의 잉여는 풍요가 아니라 양극화로 대변되는 격차의 집중의 산물이고, 무너지고 있는 중간층의 잔해 속에서 태어난 것이며, 좌절한 이상주의자이기는 커녕 이상이라는 것이 사라진 시대에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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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지표들이 오늘날 한국 사회가 '상대적으로' 사람 살 곳이 못 되는 곳임을 나타낸다. 이게 상대적인 이유는 아직도 한국이 내전의 폐허로부터 시작해, 산업화를 통한 경제성장과 민주화운동을 통한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제3세계의 거의 유일한 사례로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의 불행과 불안들마저 모두 상대적이다. 우리는 더 이상 절대 빈곤의 늪에서 허덕이 지도,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지도 않다. 휴전국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남한의 치안은 매우 잘 유지되고 있으며, 생활수준과 환경도 비교적 좋은 편에 속한다. 다만 나름대로 훌륭하게 발전된 물적 조건과 환경들을 어떤 규칙에 따라 분배하고 있느냐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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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괴로움과 고달픔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취미와 적성을 일로 만든 이들은 이제 자신의 취미와 적성에서 괴로움과 고달픔을 느꼈다. 한 개인의 감수성과 개성, 소통 능력 같은 것들이 곱게 갈려져 일과 직업이라는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면 열악한 대우 정도는 괜찮지 않느냐는 주객전도의 논리도 등장했다. 과거의 희생에는 그들이 뭔가의 거대한 이념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다는 가상의 만족감이라도 있었지만, 새로운 시대의 고달픔은 이 모든 것이 네가 선택한 것이고 너를 위한 것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런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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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우리가 꿈꿨던 미래에서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지만, 실제로는 노동의 양극화가 나타났다. 기술의 발전을 통해 과거 10명이 할 일을 혼자 떠맡게 된 사람이 과로로 죽어가는 동안, 다른 9명은 손가락을 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과로로 쓰러질 때만 나머지 9명 중 1명에게 과로할 기회가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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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선진국이나 경제기구들이 행하는 저개발국에 대한 원조와 산업 지원 같은 행위들을 포함한 모든 제스처들의 근간에는 거대한 무능함과 무기력함이 자리 잡고 있다. 사실 이것들을 통해 노리는 효과는 정확하게는 어떤 분리인데, 1 세계의 부귀영화와 3세계의 암흑 사이를 갈라줄 모종의 경계 혹은 완충지대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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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대학 졸업이 쟁반을 나르기에 너무 과한 학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도시의 일부 식당에서는 학위가 필수 요건처럼 보일 정도다. 그래야만 그날의 스페셜 요리 이름을 제대로 발음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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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는 "의사소통의 주체가 돼라"는 경영진의 명령 속에서 자신의 개성과 주체성까지 가치 생산의 내부에 포함시키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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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맹의 구성은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보수적인 종교단체'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현대의 모든 문학적 자유와 성전을 벌이는 집단이다. '학부모들'은 매체가 자신의 자녀에게도 악영향(즉 성적 하락)을 미칠지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여 검열을 주장하거나 승인한다. '언론'은 선정주의적인 보도를 통해 매체의 위해성을 부풀리고 그런 보도를 통해 시청률이나 조회수 같은 곳에서 이득을 얻는다. '검열 당국'은 검열의 범위를 더 확대하고 그를 통해 조달될 자금과 영향력을 얻으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권력'은 자신의 실책이나 책임을 면피하고, 오히려 이를 기회 삼아 더 많은 권한을 얻고자 한다. 물론 매체나 문화산업이 '순결한 피해자'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런 구성 형태가 나아갈 거의 명확한 방향은 '그 대상을 누가 어떻게 왜 정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빠져 있는 검열의 강화이고, 그것을 통해 벌어지는 사태는 표현과 언론의 자유의 심각한 왜곡과 그로 인해 부메랑처럼 돌아올 도덕적 공안정국이다.
- 150p
고자는 어떤 불능과 무능력을 표상하는 궁극의 존재다. 고자는 성관계도 생식도 불가능하고, 거세되었기 때문에 힘을 가진 자들에 의해서 유린당하곤 한다. 그러나 이런 비극적인 위치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농담과 진담 사이의 어딘가쯤에서 "내가 고자라니!"를 외쳐댔다. 이렇게 스스로의 잉여성을 인정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유희에 가까운 방식으로 바꾸는 것은 두 가지의 상반된 동기로부터 이루어진다. 하나는 말 그대로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인정하고 그것을 하나의 바닥으로 삼고자 하는 동기이며, 다른 하나는 지금의 상태를 과장하고 너스레를 떨면서 그것보다 더 깊은 심연에 대한 생각을 떨치기 위함이다. 요컨대 이런 자조의 놀이화는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인지와 그것을 회피하려는 목적을 각각 혹은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상반된 목적 사이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다. 때때로 우리가 보이는 모순적인 행동은 이 진동의 결과다. 이것은 김성모의 역설적 대사, "아까 전에 날 보고 돼지라고 했었지? 난 그 말이 좋아. 사실이니까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날 돼지라고 놀리는 건 참을 수 없다!" 같은 것이다. 내가 나를 잉여라고 자칭하며 자조 놀이를 할 때에는 내가 정말 잉여일지도 모른다는 긴장으로부터 잠깐 해방을 맛볼 수 있지만, 누군가가 나를 잉여라고 부르는 순간 나는 갑자기 그 긴장의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간다.
- 171p
더 많은 관계, 더 많은 명예, 더 많은 쾌락 등등 현실보다 가상이 비교 우위를 갖고 있을 때에만 우리는 가상에 몰두하게 된다. 현실이 우리를 내쫓았을 수도 있고, 우리가 스스로 현실로부터 도망을 쳤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가상으로 탈출을 감행하는 것은 현실을 피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도망쳐온 현실은 어떤 것인가? 외모, 재력, 지식 등등의 수많은 기준에 의해 차별선이 그어진 곳이고, 강고한 질서가 존재하기 때문에 나의 영향력이 개미만큼도 미치지 않는 곳이며, 미묘한 인간관계와 예의범절 같은 것들이 골치 아프게 널려 있는 곳이다. 재미있는 일은 하나도 없고, 해야 한다고 주어지는 과업들만 가득한데, 별다른 보상도 주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대부분의 것들은 이미 정해져 있다.
- 197p
우리도 현실에 너무 중독된(?) 나머지 가상의 공간에 현실원칙을 끌고 들어오는 실수를 범한다. 가령 '가르치려는 태도'와 잘난 척 같은 것은 현실의 불평등을 떠오르게 하므로 제1의 규탄 대상이 된다. '친목질'은 가상공간의 관계망을 순식간에 현실과 같은 아수라장으로 만든다. 권력들이 생겨나고 그 권력에 빌붙는 이들이 생겨나고, 그들 간의 파벌 싸움 속에서 평범한 유저들만 계속해서 골탕을 먹이는 식이다.
- 198p
근거 없는 비방이나, 인신공격이 갖는 파괴적 효과와 피해를 모두 무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것에는 분명히 합당한 구제책들과 예방책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해서 일일이 법의 허락을 받는 상황이 점점 현실화되어가고 있다는 점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표현의 자유와 의사소통의 문제들이 계속해서 법에 의존해 해결하려는 것은 지극히 소모적인 것은 물론이고, 소통의 단절을 불러온다.
- 226p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생존, 살아남는 것이다. 그냥 살아남는 게 아니라 '잘' 살아남는 것이다. 우리들의 시대에서 생존이란 그 자체가 일종의 궁극적인 목표처럼 변해버렸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도움과 우정이 아니라 경쟁과 손익계산을 통해 살아남는 것에 너무 익숙해졌다. 손해와 피해에 대한 강박이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우리들의 머리와 마음은 황폐하고 나약하다. 시시때때로 '멘탈 붕괴'가 일어나고,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멘탈甲'들에 대한 찬양이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우리가 인터넷에 남기는 독한 말들은 차라리 아무런 고통이나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기계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의 일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감정 없는 로봇이 되는 축복을 받지 못한 우리들 대부분은 고통도, 슬픔도, 어김없이 고개를 드는 자기와 타인에 대한 연민도 모조리 겪으면서 살아가야 한다. 때문에 생존을 위한 투쟁은 영혼을 갉아먹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살아남는 것은 중요하다. 지탱하기를 포기하는 순간 세상은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순결한 희생자로 사라지는 것보다 추악하지 않은 생존자가 되는 것이 더 어렵지만 중요한 일이다.
- 25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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